Philosophy

<다산의 마지막 습관> - 위학일익 - 3

RIAGOL 2024. 3. 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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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마지막 습관> 위학일익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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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 사이만큼 먼 것이 없다

대사도는 각 지역에서 세 가지 일을 백성에게 가르치고, 그곳의 현명한 사람을 뽑아 천거하는 일을 맡았다. 세 가지 일은 여섯 가지 덕목, 여섯 가지 행실, 여섯 가지 기예다. 그중 여섯 가지 덕목은 지식, 어진 마음, 성스러움, 의로움, 충실함, 조화다. - <주례>

맹자가 말했던 사람의 착한 본성 네 가지는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 ‘잘못을 미워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수오지심,’ ‘예의를 지키는 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시비지심’이다. 맹자는 이 네 가지 선한 마음으로부터 유교의 핵심적인 덕목인 인의예지가 발현된다고 한다. 측은지심은 인, 수오지심은 의, 사양지심은 예, 시비지심은 거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으로 맹자는 이 마음들을 ‘네 가지 단서’, 사담이라고 불렀다.

맹자에 따르면 인의예지의 단서가 되는 네 가지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으로,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이다. 맹자는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여섯 가지는 마음에서 나오므로 덕이라고 했다. 지는 옳고 그름을 구별함이요, 인은 사욕이 없음이요, 성은 통하지 않음이 없음이요, 의는 결단과 제재함이 있음이다. 자기 마음을 다함을 충이라고 하고, 어긋나는 바가 없음을 화라 한다. - <집설>

비록 초학자에게 갑자기 말해줄 수 없으나 먼저 이것으로 가르쳐서 그 표준을 알게 하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뜻을 세우겠는가? - <집해>

육덕 다음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육행이다. 육행은 육덕을 삶에서 실제로 행할 때 드러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효우목인임휼’인데 그 뜻은 이러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친족과 사이좋게 지내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친구 간에 신의를 갖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

육예는 ‘예약사어서수’로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글쓰기, 셈하기”와 같은 실용적인 공부다. 단지 좋은 덕목만 있어서도 안되며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고 정의롭게 살아가되, 일상의 삶을 위한 실용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 <주례>

다산이 가르쳤던 ‘선경후사실용’의 공부법도 이와 같다. 먼저 경학으로 그 기초를 세운 뒤에 앞 시대의 역사를 섭렵해서 그 득실과 치란의 근원을 알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에 힘을 쏟아 옛사람이 경제에 대해 쓴 글을 즐겨 읽어야 한다. 언제나 만백성을 이롭게 하고 만물을 길러내겠다는 마음을 지닌 후에야 바야흐로 군자가 될 수 있는 법이다.

공부는 이상에서 실천까지, 그 멀고 먼 간격을 좁히는 과정이다.

계산에 은둔하니 몸밖엔 서적들만 평상에 가득하다. 기력이 다해도 마음은 평안하니 몸도 마르지 않네. 모든 끝은 허무인데 인생 백 년을 무엇에 써야 할까. 이름 하나 남긴다고 낚시는 팽개치고 글이나 읊조리네. - <화정영공>

악마가 물들이기 전에 서둘러 나아가라

스승의 가르침에 제자는 공손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으로 배운 바를 극진히 해야 한다. 선한 것을 보면 따르고 의로운 일을 들으면 실행해야 한다. 항상 은유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힘만 믿고 교만해서는 안 된다. 뜻을 허망하거나 사악한 데 두어서는 안 되며, 행실은 곧아야 한다. 노니는 곳이나 거처하는 곳은 일정해야 하며, 덕이 있는 사람과 사귀어야 한다. - <관저> <제자직>

1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만 한 것이 없고, 10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만 한 것이 없으며, 일생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 <관자>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태도가 필요하다. 교육의 효과는 무엇보다 그 교육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가르침을 주는 사람에게 온화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진 사람은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태도로 임해야 배운 바를 극진히 할 수 있다.

극진히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도리를 깊이 연구해 지극한 경지에 이름을 이르는 말이다. 주자는 ‘소수사극’하는 자세를 <논어> <술이>에 실려 있는 ‘거일반삼,’ ‘하나를 일러주면 나머지 셋을 안다’의 고사에서 찾았다. 하나를 배워 셋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배움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배운 것과 연관되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지혜,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배움에 관한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자세가 있어야 배운 것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학문의 완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배움이란 근본을 지키고 익혀 나가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알기 위해 지식을 쌓아나가는 것도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도덕성의 근본이 없는 지식은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오직 효율과 합리만을 가장 가치 있는 덕목으로 여겨 모든 일을 숫자로 재단하려 하거나, 뜻을 허망하고 사악한 데 두어서 주위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삼밭에서는 쑥도 곧게 자란다

다산은 ‘뜻을 허망하거나 사악한 데 두지 말라’에서, 사를 느릴 서와 통한다고 보았다. 뜻을 바르게 세워야 하고, 뜻을 세웠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누구나 올바른 뜻에 따라 행하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막상 선뜻 나서지 못하는 까닭은 그 일의 이해타산을 따지기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일이 옳음을 알지만 닥칠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생각하거나, 잠깐 뜻을 굽혔을 때 주어지는 이익에 눈을 빼앗기면 망설일 수 밖에 없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단호한 결단이다. 바른 일이라는 확신과 불의에 굽힐 수 없다는 결단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나아갈 수 있다.

‘밖에서 노니는 곳이나 거처하는 곳은 일정해야 하며 반드시 덕이 있는 사람과 사귀도록 해야 한다’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사람의 한계를 지적한 말이다. 바로 ‘근묵자흑 근주자적’의 성어가 말하는 바와 같다. 검은 물감을 만지는 사람은 검은 물이 들기 마련이고, 빨간 물감을 가까이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그 자리를 물러서지 않는 이상 물감이 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인 이상 주위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좋은 곳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바로 마중지봉의 지혜다.

수신은 효도와 우애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니, 여기에 본분을 다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아무리 학식이 높고 글재주가 좋더라도 흙담에다 색칠하는 것일 뿐이다. 내 몸을 이미 엄정하게 닦았다면 그 벗도 자연히 단정한 사람일 것이다. 동류는 함께 모이므로 특별한 힘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천륜에 야박한 사람은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믿어서도 안 되며, 정서응ㄹ 다해 나를 섬기더라도 절대 가까이하지 마라, 끝내 은혜를 배반하고 의리를 망각하니 아침에는 따뜻하게 대하다가도 저녁에는 냉정해지기 때문이다.

공부란 모자람에 물들지 않는 분별을 익히는 것이 아니다. 물들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를 닦는 노력이다.

Photo by Alex Block on Unsplash